청록의 먹빛을 기다리며 — 서진숙
[도판] 산에는 / 수묵담채 / 1998
-서진숙 화백의 '산'을 보면서-
(남원 금지중학교 교사 한병옥)
나는 산을 좋아한다.
서진숙 화백은 산을 그린다. 그래서 난 서화백의 그림을 좋아한다.
산은 그냥 보기만 해도 좋다. 그 육중함, 굽이 치듯 흐르는 선, 하루 열두시간, 일년 삼백 예순 날, 한날 한시도 같지 않게 변화하면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은 역설, 그저 그렇게 빗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절대로 같지 않은 산 .
서화백의 산은 그래서 다양하면서도 고뇌에 차 있다. 이 놈의 산을 도대체 어떻게 형상화해야 하는 것인지. 모양은? 색채는? 속내는?
서화백도 사람이면서 도회의 물 속에서만 살았고 지금도 산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는 도시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도회는 뒤틀리고 난폭하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다. 검지에 닿아있는 버튼 같이 위태롭다.
서화백의 그림 속에도 사람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속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무리는 굳어있는 돌 같다. 자연에 녹아들지 못한 채 굳어 있다. 자신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찌보면 서화백의 산은 비틀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그렇게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원색을 동원해서 산을 만들어도 보고 형상화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의 추종으로 우리의 산은 표현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먹으로 돌아왔단다. 불자의 참선이 각의 경지에 이르고 해탈의 지경에 오르듯 묵향, 그것이 한국의 산을 한국의 자연을 표현하는 구도의 길인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그림은 어둡다, 고뇌와 번민에서 초극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모양이다.
서화백은 붓을 잡기 시작한 것이 15년을 넘었단다. 어찌보면 긴 세월이리라. 그러나 서화백 자신이 아직 제 삶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연륜이 길고 깊다 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도 그의 그림에는 고목의 뿌리가 깊은 연륜과 겨울 나뭇가지 같은 날카로움과 부처의 달관 같은 관조와 비구니의 고뇌가 엉켜 있다. 평생을 산에서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산에 대한 관조와 철학이 있다. 산에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계절 변화하는 풀, 꽃, 나무와 열매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 자연 속에서 생존의 법칙을 발견해 내는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이며, 그 자연과 생존의 법칙 속에서 달관의 경지에 이른 미소를 자아낼 수 있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그런데 아직 시집도 못 간 동정녀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면 아무래도 조금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서화백의 그림 속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아무래도 내 눈과 마음에서 서화백에 대한 편견이 심한 모양이다. 도대체 서화백은 자신의 그림 속에 그러한 것들을 다 녹여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담아내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산속에 물고기 뼈다귀 몇을 그려 넣었대서 생존의 법칙을 표현해 냈다는 것은 지나침도 보통을 넘은 것이다. 꽃과 새와 잠자리가 구름과 함께 어우러졌다고 자연의 법칙을 표현해 냈다는 것도 과장 광고다. 그러나 작품의 여기저기에서 그런 것들이 핏빛으로 묻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고도 선명하다.
그리고 이것만은 인정하자. 끊임없이 표현해내려는 그 열정, 그래서 끊임없이 앓아야 하는 고뇌의 정진,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1년이면 7~8회 이상을 전시에 투신하는 그 여린 몸의 정렬, 달관의 경지에 접근하고 있는 끝이없는 고뇌. 이만하면 대작을 잉태할만한 혹은 잉태했을만한 도량이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머지 않아 죽음에 이를 산고 끝에 제왕을 다스릴만한 왕자를 출산 할만 하지 않은가.
머지 않아 서 화백의 먹빛이 청록색으로 푸르러질 날이 올 것이다 더더욱 푸르른 청록의 먹빛으로 빛날 그 날을 기다린다.
원 게재: 작가노트 / 회화지 6호(1998) 11쪽 · 원본 PDF 13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