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와 조수미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서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서예가 무엇이냐고, 또는 서예가 어떤 예술인가를 물으면 거기에 대해서 선뜻 대답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에 먹을 적셔 종이 위에 쓰는 것이라는 것 이외에 얼른 대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쉬워 보이는 일도 막상 구체적으로 말하려면 어려워지는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서예가 그만큼 보편화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게 알지 못한다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예전에 서예는 우리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필기도구가 어느 정도 발달한 시절까지도 서예는 우리의 생활 속에 있었고 심지어는 교양 필수였고 인격 수양의 척도로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 는 옛 어른들의 말씀에 연유한 까닭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선인들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 하나하나 살펴보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서예는 그림과 달리 문자를 표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림처럼 소재의 다양성이나 변화를 가져오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표현의 한계에 이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서예는 그 한계를 劃이라는 線의 質로서 극복했습니다. 우리가 TV에서 다이빙이나 체조 경기를 볼때 해설자가 A난도, B난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A난도, B난도 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난이도 차이를 의미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난이도를 의미한다면 고난도 연기를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것으로 실력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난이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지막 착지하는 순간까지 짧은 순간에 공중에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고난도 연기를 소화해 내는 것으로 성적을 내는 것으로 압니다. 서예도 마찬가지라 생각해 봅니다. 순간적으로 그어지는 획에서 누가 더 난이도 있는 획을 구사하며 미감을 줄 수 있고 나아가 풍속의 교화까지도 이룰수 있는 가로 서예의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劃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즘에는 서예인들조차도 별다른 구별 없이 붓으로 쓴 글씨의 성질을 무조건 획이라 부르지만 본래 획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선질 자체에 골격과 살을 맞추고 혈맥과 氣가도는 생명력이 있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그 생명에 높은 인격과 사상이 실린 선을 획이라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선이 생명이 있는 선이며 높은 인품과 사상을 갖춘 선일까요. 이것 또한 말로써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볼 수 있고 안다는 것은 상당히 오랜동안 이쪽 방면에 공부를 하거나 마음의 정화를 가져오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예로부터 書如其人(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 하여 글씨란 人品과 동일시하고 서예를 공부하는 것을 인격 수양의 길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이것을 서예의 궁극적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서예의 미적 측면이나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修身(자기수행) 이후에 齊家(가정을 돌봄) 이후에 治國(나라를 다스림)이라는 동양 정신의 핵심 사상을 보여 주는 예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서예의 예술적 측면에 대해 알아봅시다. 앞에서 우리는 서예를 문자 표현 대상으로 삼는 예술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문자를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는 문장을 표현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해야 옳은 것입니다. 음악에서 노래가 문학과 음악의 만남이라면 서예는 문학과 회화가 만나서 이루는 예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예의 미적 측면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품격에서도 찾아야 되고 그 문장을 이루는 문자의 아름다움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자의 아름다움에서 추구한 것이 바로 劃(획)이라는 선질의 아름다움과 조형성 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서예에서 추구하는 획과 조형의 아름다움은 人品과 동일시되는 품격인데 그 품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의 성품과 다르지 않는 中庸의 道를 갖춤과 같습니다.
가득 차되 텅비어 있어 넘치지 않아야 하며 하되 함이 없는 무심으로 하여야 하니 때와 장소를 맞추어 나아가고 물러남에 적절해야 하고 때문에 강인할때는 강인해야 하고 부드러울 곳에서는 부드러워야 하며 크고 작고 굵고 가늘고 촉촉하고 깡마르고 좁고 넓고 빠르고 느린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절도가 있되 없는 듯이 있어야 합니다. 서예 작품에서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도 쉽지 않고 또한 작품을 감상하며 이러한 것들을 느끼기 또한 쉽지 않습니다. 비록 서예가라 할지라도 이것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에 갇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획의 질, 즉 난이도에 관한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예인들 중에서도 획의 질에 관한 것은 생각지 않고 오래 씀으로써 자연히 익숙해지는 것으로 말하곤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번이나 더쓴 나이많은 사람이 잘 쓴다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그것을 출가한지 오래된 스님이 먼저 깨치고 목회 오래한 신부나 목사님이 먼저 깨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수행을 먼저 했다고 깨치는 것이 아니듯이 서예 또한 마찬가지로 먼저 썼다고 꼭 잘 쓰는 것이 아닌 걸 보면 서예는 자기의 발견이고 수행이 근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예를 통한 수행으로 천지 자연과 사람과의 조화를 깨치고 그 얻은 바를 서예 도구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썼느냐 만으로는 서예를 제대로 하고 못하고를 가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또 노력 없이 깨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피나는 자기 노력이 있어야만 깨침이 옵니다. 그러나 피나는 노력만으로 깨쳐지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설령 이러한 획을 깨쳐 얻었다 하더라도 글씨를 잘 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획을 얻는 것이 서예의 근본이지만 이밖에도 서예의 미적 측면을 결정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여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느껴야 되고 먹색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도서의 위치와 크기도 알맞아야 하고 종이의 질감이나 색상도 어울려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다 중요하지만 서예가 다른 예술과 다른 독특한 점이 또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이 시대에 서예가 예술이다, 아니다 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서예의 단순한 표현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혹자는 서예는 그것이 그것 같다고 말합니다. 중인리 풍경을 그린 화가가 여럿이어도 그것이 그것 같다고는 안합니다. 색감도 다르고 질감도 다르고 기법도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중인리의 다양한 풍경 속에서 작가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예는 그렇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시인이나 문장가가 중인리를 읊은 시나 문장을 내놓았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서예 작품이 이루어 지기 때문입니다. 설령 많은 시인 문장가들의 수백편의 시나 문장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시나 문장을 감상할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구별이 될 까닭이 없겠지요. 그러니 그것이 그것 같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서체도 다양하게 보여 줄 수 있음에도 구별을 못하는 세상의 안목 때문에 서예는 그게 그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똑같은 문장 똑같은 서체로 쓰더라도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가 부른 어떤 노래가 어제도 부르고 오늘 또 부른다 해서 식상해 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조수미가 부른 어제 노래와 오늘 노래는 다른 것입니다. 서예도 똑같은 문장을 똑같은 서체로 똑같이 쓰더라도 같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작가 입장에서는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또한 조수미가 노래를 부르다가 "앗 실수" 했다면서 중도에 멈추고 그 부분만 수정하여 다시 부른다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부를 수 없듯이 서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모저모 살펴 부족한 곳은 채우고 남는 것은 지울 수도 있지만 서예는 그때, 그 장소, 그 먹물, 그 붓, 그 종이에 그 기분으로 쓰이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우리의 것이 아름답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우리는 모자라고 남고 엉망이 됩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를 보는 능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습니다. 좀더 깊은 애정으로 우리 자신을 보면 그 일에 분명 세계 무대로 가지고 나갈 것들이 무궁무진 하다는 것도 보일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우리를 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원 게재: 문화 초대석 / 회화지 6호(1998) 12–13쪽 · 원본 PDF 14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