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꿰뚫는 빛의 잔치
-서울 시립미술관 '99 도시와 영상전을 보고-
장춘실 (주천상고 교사)
[사진] (캡션 없음 / 전시장 설치 장면, 40쪽)
미술 전시장을 찾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들른 전시장에서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도 산뜻한 기쁨이나 계획된 나들이는 더욱 행복하다.
지난 10월 24일 우진문화공간의 미술 클럽 회원들과 함께 미술관 순례에 나섰다. 2년째 계속되는 전시장 탐방의 하나였다. 이 날 우리가 찾은 곳은 서울 지역의 미술관 및 화랑가였다. 여러 전시를 볼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곳은 서울 시립미술관의 특별전시장이었다.
바로, 서울 600년 기념관에서 전시중인 '99 도시와 영상전-세기의 빛'전이다. '99 도시와 영상전'은 3년 째 이어지는 기획전시였다. 이것은 서울시가 유일하게 지원하는 미술행사로서 참신한 기획력이 돋보여 주목 받아왔다고 한다. 지난 해의 [도시와 영상전-의,식,주 IMAGE1,2]는 한겨레신문이 뽑은 올해의 '베스트 전시'에서 그룹분야 1위로 선택되기도 했다. -세기의 빛-을 주제로 열린 이번 전시는 멀티미디어 아트 분야로 주제에 걸맞은 빛의 잔치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비디오, 컴퓨터, 사진, 홀로그램, 오브제 설치 등 영상매체들이 유기적인 동선구성과 재미난 공간의 배치를 통해 관람객들을 맞아주었다. -조금은 낯설게, 혹은 어리둥절하게- 컴컴하고 좁은 통로는 놀이동산의 요술동굴속 미로처럼 얽혀져 관람객을 긴장시켰다.
제1전시공간 : '탐구하는 빛'을 부제로 권순한, 김영진, 신현중, 염은경 등 총 19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있었다. 이 공간은 전시장 가운데로 이어진 주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이리저리 연결된 좁은 골목의 방에 작품을 배치 뜻밖의 효과를 주었다. 밀실에서 어둠을 뚫고 쏟아지는 강렬한 빛은 눈부시고,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색색의 빛을 투영시킨 물그릇이 놓여진 허은경씨의 [빛을 비추다]는 관람객에게 무척 친절했다. 관람자가 직접 물을 휘저으면 빛의 출렁거림이 벽에 반사되도록 만들어 동화속의 주인공이 된듯한 환상을 연출하였다. 투명한 그릇에 물을 담아 각각 다른 높이에 놓고 빨강, 노랑, 파랑, 초록, 주황빛의 빛을 쏘아 오색 찬란한 빛의 화려함을 이뤄낸 이 작품은 따라간 아이들을 무척 신나게 했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가 아닌 '직접 휘저어 보세요'였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단지 보는 이에 머물지 않아 좋았다. 직접 체험을 통해 작가의 마음과 생각에 접근하여,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가 있었다. 작품에 따라 음향도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산산조각 낸 유리를 바닥에 뿌리고, 크고 작은 파편을 천장과 사방벽에 가느다란 철선으로 붙여둔 방은 우주의 천체공간을 그대로 들여놓은 것 같은 신비감을 주었다. 보라와 연두, 푸르고 누런 빛이 뒤섞인 빛의 꽃밭, 바로 그것이었다. 아름다운 영혼이 모여있는 공간, 잠시 숨을 멈춘다. 숨막히는 순간에서 뒷걸음질로 빠져 온다. 눈은 하늘의 별들에 둔 채.
"덥지?"
문득, 열기를 느껴 묻는 내게 "엄마 저기서 팬이 돌고 있어요"라고 딸아이는 대답한다. 역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민감하고 예리하다. 어둠 저 편 발코니에서 팬이 더운 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작은 난간은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도시의 휘황한 밤풍경을 구경하는 효과를 낸다. 높은 언덕길을 숨차게 올라 아기자기한 2층 집을 둘러 본 것 같다, 전시장을 역동적이면서도 이처럼 오밀조밀 재미나게 꾸민 이는 대단한 재주꾼이다. 관람자는 빙 돌아 숨어있는 작품을 만나 깜짝 놀란다. 잠시 후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어 구원처럼 다가오는 빛의 찬란함에 안도한다 전시장을 설계한 이는 이런 관람객의 심리적 반응마저 작품화한 것 같다, 어둠이 주는 긴장과 빛의 충격을 받아들이며 적당한 조바심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완벽한 공간설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찾아가 보았다. 설계자는 위가건축의 민선주씨였다. 마치 도시를 설계하듯이 설계했노라는 작가의 의도를 접할 수 있었다. 사실 서울 600주년 기념관은 하나의 도시였던 셈이다.
제2전시공간 : 극성하는 빛의 공간은 김승영, 오상길, 윤영석, 이기일, 조태병, 최우람, 허구성씨 등 13명의 전시실이 있었다. 1공간과는 다르게 외곽으로 난 통로를 지나 전시실에 이르도록 짜였다. 관람자는 공간전체를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미 자신도 모르게 높이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독립된 공간에서 만난 최우람씨의 [육족곤충]은 센서를 통해 관람자가 움직이는 대로 반응을 보인다. 괴괴한 사운드와 푸른 빛의 네온은 적극 반응을 유도한다. 홀로그램을 이용해 각도에 따라 그림이 사라졌다 나타나는 이주용씨의 [꿈꾸는 역사]역시 첨단의 기법을 보여준다. 어디선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신음소리인가? 무아경인가? 아니, 그 무엇이 내면의 소리를 숨기지 못해 토해내는 것인지. 그랬다. 정체모를 불안감은 바로 이 소리였다. 빛은 밝아서 제모습을 드러내지만 어둠은 그 반대다. 빛이 주는 아름다움과 밝음은 역설적으로 어둠도 강조하게 된다, 우리 삶의 밝음 뒤에 짙은 슬픔이 자리잡은 것처럼.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다양한 쓰임새는 상상을 불허한다. 영화나 음악뿐만 아니다. 어쩌면 고전적인 의미의 미술품은 이미 잊혀진 계절이 되었다고나 할까?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본다. 작품이 "재미있었다. 이상했다. 신기했다. 교실 환경구성이 이용할 아이디어를 얻었다. 땀이 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대답은 각색이었지만 핵심은 하나로 "개성만이 살 길이다."였다. 아이들은 이미 현대 미술이 가야할 방향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꼭 꼬집어 말할 실력은 없지만 짐작은 가는 것 같아 데리고 다닌 보람이 있었다.
신세대는 영상세대요, 지금은 영상시대라 일컫는다. 분초를 다투어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떤 미술을 원하는가? 아니, 원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아직도 전시장에 가면 편안한 작품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래 길들여 온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작품은 낯설고 불안하다. 감정이 의식을 따라가지 못한다. 제법 전시장을 찾아다녔다는 관람자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결과에는 전주지역의 화단도 책임이 크다 말하면 억지일까? 순전히 관람자의 무지와 촌스러움에 기인한 것인지 묻고 싶다. 전부는 아니나, 관람자들의 안목을 높이는 임무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한다. 기대를 갖고 찾은 전시장에서 어쩐지 낯익은 그림, 어디서 본 듯한 그림, 누구랑 비슷한 그림, 더구나 과거의 작품을 또 보게 될 경우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20여년전 일이 떠오른다. 결혼 기념으로 자문을 얻어 구한 것이 지역원로의 수묵 산수화였다. 몇년 걸어두고 보다 다른 작품으로 교환했다. 눈높이가 달라진 탓이다. 우리 전주시도 서울시 같은 역할이 있었으면 좋겠다. 예향이라 목소리는 높아도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작가들의 능동적인 활동을 돕고, 전시 공간을 제공한다면 이런 획기적인 전시도 가능하리라. 설레임과 기대로 12월의 나들이를 기다린다. 작품이 나에게 주는 선물, 온전한 하루의 행복을 위해.
원 게재: 전시장을 찾아서 / 회화지 7호(1999) 40–41쪽 · 원본 PDF 42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