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병展 삶의 표상으로서의 나무
배기병 展 삶의 표상으로서의 나무
1999.12.3-12.14 ▶ 우진문화공간
[도판] 자연 / 한지. 먹. 크레파스 / 61×46
화가는 보물찾기에 뛰어든 경영자와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도 커다란 게임 판에서 숨겨진 보물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찾아 나서는, 그리고 남보다 더 나은 보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때때로 느끼는 생각이지만 이번 배기병의 작품을 보면서 한층 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보물은 무엇일까.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허공의 뜬구름과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일까. 하지만 화가는 알고 있다.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화면에서 어떤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물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그래서 자기만이 찾아낼 수 있는 고유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화가는 알고 있다.
배기병의 작품을 보면서 새삼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최근의 그의 작품은 붓과 크레용 등을 혼용하여 그 나름의 섬세하고 묘한 뉘앙스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 중앙 전면에는 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들은 대개는 벌거벗은 그래서 가지들이 앙상한 몸체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나무는 크레파스로 그려진 해질녘의 들판에 널려진 들꽃의 화려한 빛깔들을 들꽃으로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꽃이 아니라 그렇게 보여지는 명멸하는 빛깔들이다. 그것은 꽃이어도 좋고, 아니면 먼 우주 속을 여행하는 어떤 빛들의 조합인지도 모른다. 나무는 구체적인 인식의 나무이지만 그가 놓여진 세계는 단순한 인식의 세계가 아니다. 광활한 대지이기도 하고 아득한 우주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가슴에 스며있는 어떤 막막한 초현실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토록 단순하기 짝이 없는 화면의 구조를 다듬고 또 어우르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배기병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옛날 어린 시절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에서 해질녘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석양의 노을은 깊어 가는데 밭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 마음은 당산나무 그늘에 묻혀 한없이 외롭고 고독했다. 그나마 이른 별빛인양 어둠 속에서 비치는 작은 빛깔을 세어가며 외로움을 털어 냈다. 그러나 40이 넘은 나이에도 고독은 지워지지 않은 것인가. 배기병은 아직도 남다른 고독의 울타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것은 작가만이 갖는 남다른 고독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털어 내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고독이 있다. 다름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 곧 삶 그 자체가 고독이다. 나무는 동양인들이 추정했던 생명의 표상이다. 그래서 음양오행에서 나무(木)를 먼저 지정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는 곧 우리 자신의 대변임에 다름이 아니다. 배기병이 그의 작품 속에서 주된 테마로 설정한 나무는 곧 바로 그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화면 한 가운데에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서, 그것도 지극히 어둡고 침울한 그러면서도 아주 섬세하고 내밀한 대기 속에 서있는 고독한 나무 한 그루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원초적인 고독과 처절한 삶의 의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배기병의 작품 속에서 마치 우리는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듯이 우리 자신의 고독과 삶의 모습을 발견해 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그의 개인적인 남다른 외롭고 고독한 삶의 여정을 표출함에 있어 선택한 종이와 먹, 그리고 크레파스 등이 엮어내는 그만의 표현의 방식에 대해 밀도 있는 탐색이 필요할 것 같다. 먹과 모필과 크레파스는 애초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이다. 그가 굳이 선택하고 있는 크레파스는 분명 실험적인 재료의 선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전통회화의 실험적 방식이 질료의 개발로서만이 아니라 전통회화 그 자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실험적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1999. 11. 전북대학교 교수 이 철 량
원 게재: 전시리뷰 / 회화지 7호(1999) 6–7쪽 · 원본 PDF 8쪽 ↗


